본문 바로가기
캐나다 이민

캐나다 '한달만에 영주권 받은' 독립이민

by 에밀리in토론토 2020. 11. 7.

어느덧 캐나다에 이민 온 지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7년이라... 짧지 않은 세월인데, 뒤돌아 보니 17년은 마치 7년처럼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다.

남편의 독립이민 신청으로, 나는 캐나다에 왔다.

캐나다 살기 전에, 미국, 이태리에서 살아봤던 경험이 있어,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나는 해외생활이 맞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민을 너무나 반대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해외생활은 너무 외로웠고, 힘들었고, 언어문제에 스트레스가 정말 심했다. 그냥 해외가 싫었다.

 

그러나, 한국 생활이 맞지 않는 남편은 나 모르게 캐나다 독립이민을 신청해 놓고, 신청한 지 한 달 만에 캐나다 영주권 승인을 받아내고, 내게 통보를 했다. "미국 FBI에서 범죄 조회 기록을 확인해 보고, 문제없으면 바로 영주권을 보내겠노라고 캐나다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남들은 캐나다 영주권을 받기 위해, 보통 2년의 세월이 걸린다는데, 이민 영어 시험 만점 받고, 인터뷰 쉽게 하고 한 달 만에 영주권 확보. 참 대단하다구나.. 할 말을 잃었었다. 주변에서도 모두 한 달 만에 나온 영주권에 신문에 나올 일 이라며, 놀라워했다.

그토록 내가 캐나다 이민을 반대했건만, 나 모르게 영주권을 받아내고 통보를 하다니, 이혼하고 싶었다.

이혼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강하게 부탁했다. 제발 가자고, 캐나다 가면, 미국에서 살았던 것처럼 연봉 1억 받을 수 있다고. 자기는 한국 사회가 싫다고.. 한국 회사 다니면, 자기는 단명할 거라고.

 

그때 내 나이 겨우 20대 후반, 남편은 30대 초반이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남편은 한국에 돌아와 회사 다니는 것을 너무 힘들어했다. 특히 회식 자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힘들어했다. 술 마시러 회사 다니는 것 같다고 했다. 결국, '지방간'이라는 병이 생겼다. 남편을 스카우트한 한국 회사에 위약금을 물어주고, 결국 우리는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을 떠났다.

 

20년 전에 남편이 미국에서 받은 연봉은 1억 가까이 됐다.

지금도 연봉 1억은 고액 연봉인데, 20년 전에 그 정도를 받았으니, 그때는 실감하지 못했지만, 남편은 참 대단했던 것 같다. 20대 후반에 그렇게 고액 연봉을 받았으니, 너무나 당당했고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던 사람이었다. 남편은 나에게 호언장담했다. 캐나다 이민 가서도 그렇게 받을 수 있다고. 자신을 믿어 달라고.. 나를 달래고 달래서 캐나다에 왔다.

 

내게도 꿈이 있었다.

클래식을 사랑했고, 미래 훌륭한 성악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한국에서 음대를 나오고, 이태리에서 성악을 공부했고, 한국에 돌아가면, 내 꿈을 펼쳐 보리라 다짐하고 공부했는데, 남편의 꿈 앞에, 나는 나의 꿈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조용히 접었어야 했다.

 

호언장담 하던 캐나다 취업과 연봉 1억! 그것은 신기루였다.

나보다 6개월 먼저 캐나다에 가서, 취직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겠노라." 웃으며 장담했던 남편은, 내가 캐나다에 갈 때까지 백수로 지내고 있었고, 수백 군데 이력서를 보냈지만 헛수고였다. 결국 헤드헌터를 찾아가서 취업을 도모했지만, 남편은 헤드헌터가 제공하는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남편의 자존심 때문에, 본인이 원하는 조건을 제시하지 않으면, 다 싫은 거였다.

이쯤 되면 취직을 원하는 게 아니라, 취직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정말 힘들었다.

제발 눈을 좀 낮추라고 울면서 애원했지만, 취직 안 하면 안 했지, 절대 눈을 낮출 수 없다고 버팅겼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돌아가서 예전처럼 지내자고 울며불며 애원하고 또 애원했지만, 남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 후로 남편은 삶에서 경험해 보지 못했던, 힘든 일을 하면서 보냈다. 아마도 본인에겐 '말할 수 없는 아픈 시간이었을 것이다. 늘 1등이었던 삶에서, 캐나다의 이민은 생각지도 못했던 큰 난관이었고, 설움이었다.

결국 남편은 직접 비즈니스를 개발하고, 안정적인 캐나다 이민으로 나름 성공했지만, 그전까지 비디오 가게 캐쉬어, 영업직, 신문배달 등 여러 힘든 일을 경험했다. 남편은 자존감이 바닥을 찍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거만하고 경솔한 사람이었는지, 인생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겸손하게 살겠노라 다짐했다고 했다. 

 

또한 그런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배웠다고 했다. 그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비즈니스 개발 아이디어를 얻어 제대로 시작할 수 있었고, 피붙이 하나 없는 캐나다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보와 도움을 받았다. 세상에 공짜가 없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20대 후반,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돈 없이 시작한 이민이었다. 작은 방 하나 렌트하고, 차도 없이 뚜벅이로 살고, 돈 100불을 버짓으로 차이나 타운에서 장을 보며 버티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늘 말한다. "그때 자식이 있었다면, 이런 이민 못했을 거라고." 지금 다시 그렇게 살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 

"젊어서 고생, 사서도 한다."라더니, 그 모든 고생들이 지금의 우리를 캐나다 땅에서 잘 버티게 해 주는 것 같다.

살면서 누구나 겪는 인생의 굴곡을, 캐나다 초기 이민 정착에서 우리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캐나다 이민을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절대 돈을 들고 오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이미 캐나다 이민 전에 미국에서 생활을 해 봐서, 정착전에 돈을 들고 오면, 돈이 얼마나 쉽게 없어지는지 깨달았었다. 미국에서 평생 살 줄 알고, 새 차도 사고, 살림도 모두 새것으로 샀었다. 그래서 캐나다 이민을 결정했을 때, 돈을 들고 가지 않았다. 우리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두 번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캐나다에 돈을 들고 갔다면 우리는 고생은 덜 했겠지만, 돈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돈 없이 시작한 이민 많은것을 배웠다.

 

어느덧 내 나이 마흔 중순.

20대 후반을 거친 내 이민 생활은 이제 자식의 교육을 위해 애쓰며 살고 있다.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신 부모님께 감사하며,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키우셨듯이, 이제는 내 아이들을 잘 가르쳐, 이민가정의 뿌리를 제대로 내리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하루하루 주어진 삶에 감사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다.